한국사능력검정시험 제52회 심화 기출문제 해설 (11번~20번)
풀이에 대한 접근) 거란의 침입을 받았을 때, 불심으로 극복하기 위해 초조대장경을 간행하였다. 현종 때부터 문종 때에 걸쳐서 완성되었으나 몽골의 침입을 받아 불타 없어졌다.
① 강감찬이 귀주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 - 고려 현종 시기에 거란의 3차 침입, 귀주 대첩(1019)입니다.
② 사신 저고여가 귀국길에서 피살되었다. (×) - 몽골 사신 저고여는 고려를 겁박하여 공물을 얻어내기 위하여 고려에 왔다가 귀국길에 여진족에게 피살(1225)되었습니다. 몽골은 이를 빌미로 고려를 침략했습니다.(1231)
③ 별무반을 창설하여 군사력을 강화하였다. (×) - 고려의 숙종 시기입니다. (1104)
④ 거란을 배척하여 만부교 사건이 일어났다. (×) - 고려의 태조 왕건시기입니다.(918~943)
⑤ 서희가 외교 담판으로 강동 6주를 확보하였다. (×) - 고려의 성종 시기입니다.(1차 침입, 993)
따라서 정답은 ① 번입니다.
풀이에 대한 키워드) 고려 예종 때 질병을 치료하고 수습하기 위하여 구제도감을 설치하다.
ㄱ. 기근에 대비하기 위하여 구황촬요를 간행하였다. (×) - 구황촬요는 조선 명종 때 흉년에 대처하고자 간행된 책입니다.
ㄴ. 개경에 국립 의료기관인 동서 대비원을 설치하였다. (○) - 고려 문종 때 환자를 치료하고 갈 곳 없는 환자들을 수용하였습니다. 개경의 동쪽과 서쪽에 각각 동대비원, 서대비원을 두었습니다. 이를 합쳐서 동서대비원이라고 합니다.
ㄷ. 호조에서 정한 사창절목에 따라 사창제를 시행하였다. (×) - 흥선대원군 집권시에 환곡 개혁으로 환곡제를 폐지하고, 큰 마을 단위로 사창제를 실시하여 농민의 부담을 경감시켰습니다.
ㄹ. 기금을 모아 그 이자로 빈민을 구휼하는 제위보를 운영하였다. (○) - 고려 광종 때 빈민과 병자들을 구제하기 위하여 제위보를 설치하였습니다.
따라서 정답은 ④ 번입니다.
풀이에 대한 접근) 원종은 태자 시절에 몽골과의 강화를 맺기 위하여 쿠빌라이 칸을 만났다. 고려 후기 원간섭기 시기이다.
① 쌍기의 건의로 과거제가 도입되었다. (×) - 고려 광종은 쌍기의 건의로 과거제를 실시하였습니다.
② 동북면 병마사 김보당이 난을 일으켰다. (×) - 고려 명종 시기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③ 이제현이 만권당에서 유학자들과 교류하였다. (○) - 만권당은 고려 충선왕이 원나라 연경에 있을 때 운 독서당으로 이제현 등이 원의 학자들과 교류하면서 성리학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켰습니다.
④ 묘청 등이 중심이 되어 서경 천도를 주장하였다. (×) - 고려 전기 인종 때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⑤ 최충헌이 봉사 10조를 올려 시정 개혁을 건의하였다. (×) - 고려 무신 정권 초기 명종 때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따라서 정답은 ③ 번입니다.
풀이에 대한 접근) 부석사 무량 수전은 국보 제18호로 경북 영주시에 있는 주심포 양식의 건축물이다. 국내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이다.
① 공주 마곡사 대웅보전 (×) - 보물 801호로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지어진 17세기에 건립된 건물입니다.
②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 - 부석사 무량 수전은 국보 제18호로 경북 영주시에 있는 주심포 양식의 건축물이다. 국내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입니다.
③ 예산 수덕사 대웅전 (×) - 충청남도 예산에 있는 수덕사 대웅전은 고려시대의 대표적인 건축물로 충렬왕 때 건축되었습니다.
④ 구례 화엄사 각황전 (×) - 전라남도 구례군 화엄사 각황전은 조선후기의 건축물입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으며 인조 때 화엄사를 복구하였으며 각황전은 숙종 때 중건되었습니다.
⑤ 안동 봉정사 극락전 (×) - 안동에 위치하고 있는 봉정사 극락전은 정면 3칸, 측면 4칸의 주심포계 맞배지붕 건물로 기둥은 배흘림 양식입니다.
따라서 정답은 ② 번입니다.
풀이에 대한 접근) 고려시대 숙종 때에 은화를 만들었는데 은병, 활구로 불리었다.
① 책문 후시를 통한 교역이 활발하였다. (×) - 후시는 조선 후기 상인들이 전개한 일종의 밀무역이었습니다.
② 송상이 전국 각지에 송방을 설치하였다. (×) - 조선 후기에 성장한 송상(개성상인)은 전국에 송방이라는 지점을 설치하고 활동기반을 강화하였습니다.
③ 감자, 고구마 등이 구황 작물로 재배되었다. (×) - 17세기 이후, 외국에서 고구마(1600년대 초), 감자(1824~5), 고추, 토카토 등 새로운 작물들도 전래되어 이전보다 먹을거리가 많아졌습니다.
④ 경시서의 관리들이 수도의 시전을 감독하였다. (○) - 고려 정부는 개경 내에서 매점매석과 같은 상행위를 감독하기 이해 경시서를 설치하였습니다.
⑤ 광산을 전문적으로 경영하는 덕대가 나타났다. (×) - 조선후기에 우리나라 고유의 개발방식으로 경영주와 소유주가 존재하는 덕대제가 있었습니다.
따라서 정답은 ④ 번입니다.
풀이에 대한 접근) [정도전] 고려말 조선초의 정치가로 호는 삼봉이라 한다. 고려말 조선초의 조례를 정리한 최초의 법전인 조선경국전을 편찬하였다. 또한 재상 중심의 정치를 포함한 정치 조직의 초안이 담긴 경제문감을 저술하였다.
① 불씨잡변을 지어 불교를 비판하였다. (○) - 정도전은 불씨잡변을 통해 불교를 비판하였고 성리학을 기본 통치 이념으로 삼았습니다.
② 칭제 건원과 금국 정벌을 주장하였다. (×) - 묘청은 국왕을 황제로 칭하며, 자주적이고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칭제건원)하고, 금(여진)을 정벌(금국정벌)하여 고구려의 옛 영토를 회복할 것을 주장하였습니다.
③ 지공거 출신으로 9재 학당을 설립하였다. (×) - 고려 문종 때에 최충이 9재 학당을 설립하였습니다.
④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 서원을 건립하였다. (×) - 서원의 시초는 조선 중종때 풍기 군수 주세붕이 안향의 구가에 세운 백운동서원(경북 영주시)입니다.
⑤ 충청도 지역에 대동법을 실시하자고 건의하였다. (×) - 유학자이자 실학자인 김육은 대동법 확대를 위해 노력하여 충청도로 대동법이 확대되었습니다.
따라서 정답은 ① 번입니다.
풀이에 대한 접근) 고려사는 고려시대의 역사서이다. 세종 때 편찬하기 시작하여 문종 때에 완성하였다.
① 남북국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하였다. (×) - 유득공의 발해고입니다.
② 세가, 열전, 지, 연표 등의 체제로 구성되었다. (○) - 삼국사기와 고려사 등이 기전체로 편찬되었습니다. 기전체는 사마천의 '사기'에서 처음으로 시작된 서술 방식으로 본기, 세가, 표, 지, 열전으로 역사를 구성하는 방식입니다. 기전체를 따랐지만 삼국사기에는 '세가'가 없으며 고려사에는 '본기'가 없습니다.
③ 고구려 건국 시조의 일대기를 서사시로 표현하였다. (×) - 이규보의 동명왕편입니다.
④ 불교사를 중심으로 고대의 민간 설화를 수록하였다. (×) - 충렬왕 때 일연이 저술한 삼국유사입니다.
⑤ 단군 조선부터 고려 말까지의 역사를 다룬 통사이다. (×) - 동국통감은 서거정 등이 왕명(세조)에 의해 단군 조선부터 고려 말까지 정리한 편년체의 통사입니다.
따라서 정답은 ② 번입니다.
풀이에 대한 접근) 태종은 두 차례에 걸친 왕자의 난을 진압하고 자신에게 반대하던 형제들과 정도전 등의 개국 공신을 숙청하였다. 왕권 강화 측면에서 도평의사사를 폐지하고 왕이 직접 6조를 관할하는 6조 직계제를 실시하였다.
① 금속 활자인 갑인자를 제작하였다. (×) - 조선시대 세종입니다.
② 삼수병으로 구성된 훈련도감을 창설하였다. (×) - 임진왜란 중 조선시대 선조시기입니다.
③ 인재 양성을 위해 초계문신제를 시행하였다. (×) - 조선시대 정조입니다.
④ 경국대전을 완성하여 통치 체제를 정비하였다. (×) - 조선시대 성종입니다.
⑤ 문하부를 폐지하고 낭사를 사간원으로 독립시켰다. (○) - 조선시대 태종입니다.
따라서 정답은 ⑤ 번입니다.
풀이에 대한 접근) (가) 1519년 조광조가 대사헌에 오른 후 현량과를 실시하여 사림을 많이 등용하고 이들은 반정 공신들의 비리를 척결하고자 공신의 위훈을 삭제하였는데, 이것이 기묘사화의 직접적 원인이 되었다. (기묘사화, 1519)
(나) 왕실의 외척이면서 기성 사람의 신망을 받던 심의경 중심의 서인과 당시 명망이 높고 신진 사람의 지지를 받던 김효원 중심의 동인 사이에 이조 전랑의 대립으로 붕당이 이루어졌다.(1575)
① 외척 간의 대립으로 윤임이 제거되었다. (○) - 을사사화는 명종 즉위 후 윤원형 일파인 소윤이 윤임 일파 대윤을 숙청하면서 사림이 큰 피해를 입은 사건으로 이후 윤원형이 정국을 주도하였습니다. (1545)
② 조의제문이 발단이 되어 김일손 등이 화를 입었다. (×) -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사초에 포함시킨 이는 김종직의 제자인 김일손으로, 이로 인해 무오사화(1498)가 발생되었습니다. (가) 이전입니다.
③ 붕당의 폐해를 경계하기 위한 탕평비가 건립되었다. (×) - 영조는 이인좌의 난(1728)을 진압한 후 노론과 소론을 막론하고 당파심이 강한 자를 제거함으로써 탕평책을 펴나가려고 노력하였습니다. 또한 성균관에 탕평비를 세웠습니다. (나) 이후입니다.
④ 희빈 장씨 소생의 원자 책봉 문제로 환국이 발생하였다. (×) - 장희빈 소생을 원자로 정호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서인인 송시열 등이 반대하다 쫓겨나고 남인이 집권하였습니다. 이후 인현왕후가 폐출되고 희빈 장씨가 왕비로 책봉되었습니다.(기사환국, 1689) (나) 이후입니다.
⑤ 폐빈 윤씨 사사 사건의 전말이 알려져 김굉필 등이 처형되었다. (×) - 김굉필은 갑자사화 때 처형되었습니다. (가) 이전입니다.
따라서 정답은 ① 번입니다.
풀이에 대한 접근) 이황의 저서로는 '성학십도' 등이 있다.
① 양명학을 연구하여 강화학파를 형성하였다. (×) - 정제두는 소론 학자를 중심으로 명맥을 이어가던 양명학을 체계적으로 연구하여 강화학파로 발전시켰습니다.
② 일본에 다녀와서 해동제국기를 편찬하였다. (×) - 신숙주는 통신사로 파견되어 일본에 가서 우리의 학문과 문화를 전달하였고 일본의 인명, 지명 등을 한자로 기록하였습니다. 후에 이 기록을 바탕으로 해동제국기를 완성하였습니다.
③ 예안 향악을 시행하여 향촌 교화를 위해 노력하였다. (○) - 향약은 16세기 이후 이황(예안향약, 파주향약)과 이이(해주향약, 서원향약)의 노력으로 전국적으로 확산되었습니다.
④ 유학 경전을 주자와 달리 해석한 사변록을 저술하였다. (×) - 박세당은 양명학과 노장사상의 영향을 받아 사변록을 저술하였습니다.
⑤ 가례집람을 저술하여 예학을 조선의 현실에 맞게 정리하였다. (×) - 조선 중기의 유학자 김장생은 가례집람을 지어 예학을 조선의 현실에 맞게 정리하였습니다.
따라서 정답은 ④ 번입니다.
★ 개인적으로 만드는 기출문제 해설이기 때문에 공부를 하시다가 오류사항이 있으실 경우에는 댓글로 남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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