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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능력검정시험

한국사능력검정시험 제54회 심화 기출문제 해설 (1번~10번)

by joocabin 2024. 2.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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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능력검정시험 제54회 심화 기출문제 해설 (1번~10번)

 

54-1

 

풀이에 대한 접근) 빗살무늬 토기, 갈돌 갈판 등에서 신석기시대이다.

 

① 가락바퀴를 이용하여 실을 뽑았다. (○) - 신석기시대에는 농경과 목축을 시작하였으며 강가나 바닷가에 움집을 지어 정착 생활을 하였습니다. 가락바퀴(실을 뽑는 데 사용)와 뼈바늘을 통해 옷이나 그물을 만들어 사용하였습니다.

② 명도전을 사용하여 중국과 교류하였다. (×) - 명도전과 반량전이 철기와 함께 발굴되면서, 이것을 통해 중국과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철기 시대입니다.

③ 의례 도구로 청동 방울 등을 사용하였다. (×) - 청동기, 철기 시대입니다.

④ 거푸집을 이용하여 세형동검을 제작하였다. (×) - 기원전 5세기경 철기 유입 이후입니다.

⑤ 많은 인력을 동원하여 고인돌을 축조하였다. (×) - 청동기 시대입니다.  

따라서 정답은  번입니다. 

 

54-2

 

풀이에 대한 키워드) 동예에는 읍군(읍장), 삼로라는 군장이 있어서 자기 부족을 다스렸으나 이들은 큰 정치 세력을 형성하지 못하였다. 동예에서는 특산물로 과하마(말), 낙랑의 단궁, 반어피(바다표범가죽) 등을 생산하였다. 

 

① 신성 지역인 소도가 존재하였다. (×) - 삼한입니다.

② 혼인 풍습으로 민며느리제가 있었다. (×) - 옥저의 결혼 풍습입니다.

③ 읍락 간의 경계를 중시하는 책화가 있었다. (○) - 동예에서는 다른 부족의 생활권을 침범하면 책화라 하여 노비와 소, 말로 변상하게 하였습니다. 

④ 제가 회의에서 나라의 중대사를 결정하였다. (×) - 고구려의 정치제도입니다. 

⑤ 여러 가(加)들이 별도로 사출도를 주관하였다. (×) - 부여입니다. 

따라서 정답은  번입니다. 

 

54-3

 

풀이에 대한 접근) 지산동 고분군은 경상북도 고령 지역에 있으며 고령 지역에는 대가야가 있었다.

 

① 범금 8조의 의미를 살펴본다. (×) - 고조선입니다. 

② 임신서기석의 내용을 분석한다. (×) - 신라 시기입니다.

③ 안동도호부가 설치된 경위를 찾아본다. (×) -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당은 고구려의 옛 땅에 둔 최고 군정기관입니다.

④ 22담로에 왕족이 파견된 목적을 알아본다. (×) - 백제 무령왕의 업적입니다.

⑤ 가야 연맹의 중심지가 이동한 과정을 조사한다. (○) - 김해의 금관가야가 중심이 되어 연맹 왕국으로 발전하였습니다. 이를 전기 가야 연맹이라고 부릅니다. 5세기 후반에는 고령 지방의 대가야를 새로운 맹주로 하여 후기 가야 연맹을 이룩하였습니다.

따라서 정답은 번입니다. 

 

54-4

 

풀이에 대한 접근) 법흥왕은 병부를 설치하여 병권의 일원화를 도모하였고, 율령을 반포하고 처음으로 백관의 공복을 제정하여 귀족을 관료로 등급화하여 17관등제를 마련하였으며, 골품제도를 정비하였다.

 

① 이사부를 보내 우산국을 복속하였다. (×) - 지증왕 시기입니다.

② 관료전을 지급하고 녹읍을 폐지하였다. (×) - 신문왕 시기입니다.

③ 이차돈의 순교를 계기로 불교를 공인하였다. (○) - 법흥왕 때 이차돈의 순교라는 토착신앙과의 갈등 속에서 불교를 수용하여 사상적인 융화를 꾀하였습니다.

④ 인재 등용을 위해 독서삼품과를 시행하였다. (×) - 원성왕 시기입니다.

⑤ 거칠부에게 명하여 국사를 편찬하게 하였다. (×) - 진흥왕 시기입니다. 

따라서 정답은  번입니다. 

 

54-5

 

풀이에 대한 접근) 생소한 문제지만 다행히 틀린 것을 찾아내면 된다. 그림을 모르는 경우, 채색 기법이나 선의 모양으로 찾아낸다. 의복 등으로 찾아내는 방법도 있는데 벽화의 상태가 좋지 않아 잘 관찰해야 한다. 고구려의 생활양식을 보여주는 다양한 벽화를 찾으면 된다.

 

(○) - 평안남도 강서군 수산면에 소재한 수산리벽화무덤의 수산리 곡예도입니다. 

(○) - 중국 길림성에 소재한 무용총의 벽화인 접객도입니다. 주인은 크게 시동은 작게 그려졌으며 신분에 따라 크기를 다르게 그렸음을 알 수 있습니다. 

(○) - 고구려의 굴식 돌방무덤인 강서대묘에 나타나는 사신도(현무) 벽화입니다. 

(○) - 중국 길림성에 소재한 각저총의 씨름도입니다. 

(×) -  경상남도 밀양시 청도면에 있는 조선시대의 무덤인 '밀양 박익 벽화묘'의 그림입니다. 

따라서 정답은  번입니다. 

 

54-6

 

풀이에 대한 접근) (가) 백제 멸망(660) : 황산벌 전투는 충청남도 논산 일대에서 일어난 전투이다. 의자왕이 보낸 계백의 5천 결사대와 김유신이 이끈 신라군이 대결하였으며 화랑 관창과 반굴 등이 활약하여 신라군이 승리하였다. 이후 신라군은 사비성으로 진출하여 당군과 함께 백제를 멸망시켰다.

(나) 나.당 전쟁(670~676) :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당은 안동 도호부를 설치하여 한반도 전체를 장악하려는 야욕을 나타냈다. 당의 20만 대군을 매소성에서 격파(675)하여 나.당 전쟁의 주도권을 장악하였고, 금강 하구의 기벌포에서 당의 수군을 섬멸(676)하여 당의 세력을 완전히 몰아냈으며, 평양에 있던 안동 도호부도 요동성으로 밀어내는 데 성공하였다. 결국 신라는 대동강~원산만에 이르는 삼국 통일을 이룩하였다.

 

① 고국원왕이 평양성에서 전사하였다. (×) -  근초고왕은 4세기 때 평양성을 공격하여 고구려의 고국원왕을 전사시켰습니다. (371) (가) 이전입니다.

② 성왕이 관산성 전투에서 피살되었다. (×) - 성왕은 친히 군사를 이끌고 신라를 치다가 관선성 전투에서 전사(554) 하니, 백제의 중흥은 큰 타격을 입게 되었습니다. (가) 이전입니다. 

③ 김춘추가 당과의 군사 동맹을 성사시켰다. (×) - 김춘추는 즉위 전 선덕여왕 때에 대야성이 백제에 함락되자 죽음을 무릅쓰고 고구려(642)에 사신으로 갔으나 군사 원조를 얻는 데에 실패하였습니다. 이후 당과 군사 동맹을 성사시켰고(648), 백제, 고구려 공격 시 당의 군사 원조를 받아 삼국 통일의 토대를 마련하였습니다. (가) 이전입니다.

④ 을지문덕이 살수에서 수의 군대를 물리쳤다. (×) - 수 양제의 침입 때에 을지문덕이 적을 유인한 뒤 살수에서 크게 격파하여 살수 대첩이라 합니다. 이 결과 수는 무리한 토목 공사와 침략 전쟁으로 멸망하였고 당이 건국되었다. (618) (가) 이전입니다.

⑤ 안승이 신라에 의해 보덕왕으로 임명되었다. (○) - 고구려 부흥운동(670) : 검모잠은 고구려가 망하자 (668) 유민을 모아 안승을 왕으로 옹립하여 한성을 근거지로 삼아 고구려 부흥운동을 일으켰습니다. 이후 안승은 신라에 투항하고 문무왕에 의해 보덕국왕에 봉해집니다. (670)

따라서 정답은 번입니다. 

 

54-7

 

풀이에 대한 접근) 해동성국 등에서 발해이다.

 

① 광군을 창설하여 외침에 대비하였다. (×) - 광군은 고려 정종 때 거란을 대비로 조직된 특수 부대입니다.

② 9서당 10정의 군사 조직을 운영하였다. (×) - 통일신라 신문왕 때입니다.

③ 광덕, 준풍 등의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다. (×) - 고려 광종 시기입니다.

④ 5경 15부 62주의 지방 행정 제도를 갖추었다. (○) -  발해 선왕 때입니다.

⑤ 지방관을 감찰하기 위해 외사정을 파견하였다. (×) - 신라 문무왕 시기입니다. 

따라서 정답은 번입니다. 

 

54-8

 

풀이에 대한 접근) (가) 진성여왕 때(9세기 후반), 중앙정부에서 관리를 파견하여 세금을 독촉하자 각 지역에서 농민반란이 일어났다. 이들 반란군 집단 가운데 붉은 바지를 입은 집단이 있었는데 적고적이라 불렀다.

(나) (다) 8세기 후반인 혜공왕 이후로 시작된 신라 말기 (하대)에는 진골 귀족의 내분으로 김헌창의 난(822), 김범문의 난(825), 장보고의 난(846) 등 왕위 쟁탈전이 계속되어 왕권이 약화되고 귀족세력이 다시 득세하기 시작하였다.

전체적인 흐름을 진골 귀족의 내분, 왕위 쟁탈전, 농민 반란 및 도적의 발생 순으로 기억하면 편리하다.

 

④ (나) (822) - (다) (846) - (가) (9세기 후반) 

따라서 정답은 번입니다. 

 

54-9

 

① (가) - 백제 금동 대향로가 출토되었다. (×) - 부여 능산리 백제시대 절터에서 백제의 금동대향로가 발견되었습니다. 

② (나) - 온조왕이 왕성으로 삼았다. (×) - 백제 건국 설화에 따르면 비류는 미추홀(인천)에서 나라를 세웠고 온조는 위례에 나라를 세웠습니다. 

③ (다) - 재상을 선출하던 천정대가 있었다. (×) - 천정대는 백제 때에 재상을 선출하던 곳으로 정사암이라고도 불렀습니다. 충남 부여군 규암면에 있습니다. 

④ (라) - 무령왕과 왕비의 무덤이 발굴되었다. (×) - 무령왕릉은 1971년 송산리 고분군의 배수로 공사 중에 우연히 발견되었습니다. (가)에 대한 설명입니다. 

⑤ (마) - 석탑 해체 과정에서 금제 사리봉영기가 발견되었다. (○) - 미륵사지 석탑 해체 과정에서 금제 사리봉영기가 발견되었습니다. 

따라서 정답은  번입니다.

 

54-10

 

풀이에 대한 접근) 신검, 금강, 김부(신라 마지막왕인 경순왕의 이름) 등에서 견훤이다.

 

① 사림원을 설치하여 개혁을 실시하였다. (×) - 고려 충선왕입니다.

② 국호를 마진으로 바꾸고 철원으로 천도하였다. (×) - 후고구려의 궁예입니다.

③ 김흠돌을 비롯한 진골 귀족 세력을 숙청하였다. (×) - 신라 신문왕입니다.

④ 정계와 계백료서를 지어 관리의 규범을 제시하였다. (×) - 고려 태조 왕건입니다.

⑤ 오월(吳越)에 사신을 보내고 검교태보의 직을 받았다. (○) - 견훤은 6두품 출신의 최승우를 등용하면서 통치체제를 정비하였고, 오월, 후당, 거란, 일본 등과 활발한 외교 활동을 펼쳤습니다. 

따라서 정답은 번입니다.

 

★ 개인적으로 만드는 기출문제 해설이기 때문에 공부를 하시다가 오류사항이 있으실 경우에는 댓글로 남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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