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능력검정시험 제48회 심화 기출문제 해설 (1번~10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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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능력검정시험 50문항 중 첫 번째 문제는 대부분 구석기, 신석기, 청동기, 철기 시대를 구분할 수 있는지의 문제가 주로 출제됩니다. 따라서 시대구분을 위한 키워드를 암기하고 계시면 풀이가 쉬울 수 있습니다.
[구석기 시대] - 약 70만 년 전 - 뗀석기의 종류 사냥도구 : 주먹도끼, 찍개, 찌르개, 팔매돌 등 조리도구 : 긁개, 밀개 등 - 주먹도끼 : 짐승을 사냥하고 가죽을 벗기며, 땅을 파서 풀이나 나무뿌리를 캐는 등 여러 용도에 사용하는 만능 석기 - 나무 열매나 풀뿌리 채집, 짐승 사냥 - 동굴이나 막집 거주, 먹을 것을 찾아 이동생활 - 불 이용 |
[신석기 시대] - 기원전 8000년경 시작 - 간석기 - 돌낫 : 추수 - 갈돌, 갈판 : 곡식을 갈 때 사용 - 농경과 목축의 시작 - 정착 생활 : 강가나 바닷가에 움집 - 가락바퀴 (실을 뽑는데 사용)와 뼈바늘을 통해 옷이나 그물을 만들어 사용하였다. - 사냥과 채집, 고기잡이 - 빗살무늬토기에 식량 저장 - 농경과 정착 생활 : 애니미즘, 샤머니즘, 토테미즘 등의 원시 신앙이 발생 |
[청동기 시대] - 기원전 10세기경 - 권력을 가진 지배자인 군장(족장)의 출현 - 청동기 제작과 관련한 전문 장인의 출현 - 사유 재산 제도와 계급 발생 - 대표적 유물 : 반달 돌칼, 바퀴날 도끼, 홈자귀 등의 석기와 북 방 계통의 비파형 동검과 화살촉, 거친 무늬 거울 등의 청동기, 미송리식 토기, 민무늬 토기, 붉은 간 토기 등의 토기 - 고인돌(유력자의 무덤, 집단 무덤, 묘역의 표시, 제단 등으로 추정되며 많은 인력을 동원하여 만들었다.), 돌무지무덤, 돌널 무덤 등 |
[철기 시대] - 기원전 5세기경 철기 유입 이후 청동기는 의식용 도구로 변하였다. - 세형동검, 잔무늬 거울, 거푸집 - 쟁기, 쇠스랑 등의 철제 농기구를 제작 - 널무덤과 독무덤이 나타나기 시작 - 명도전, 반량전(원형에 네모난 구멍이 있는 청동 화폐로 중국 진(秦)나라 시대의 화폐) : 중국과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
풀이키워드) 농경과 정착생활 - 신석기시대
① 주로 동굴이나 강가의 막집에서 살았다. (×) - 구석기시대입니다.
② 지배층의 무덤으로 고인돌을 축조하였다. (×) - 청동기 시대입니다.
③ 거푸집을 이용하여 세형동검을 제작하였다. (×) - 철기 시대입니다.
④ 빗살무늬 토기를 만들어 식량을 저장하였다. (○) - 신석기시대입니다.
⑤ 쟁기, 쇠스랑 등의 철제 농기구를 사용하였다. (×) - 기원전 5세기 경 철기가 보급된 후 사용되었습니다.
따라서 정답은 ④번입니다.
부여, 고구려, 옥저, 동예, 삼한 등 여러 나라의 구분이 필요한 문제입니다. 간단하게 정리해 보았으니, 반복해서 보시면 암기하실 수 있습니다.
정치 | 제천행사 | 결혼 | 풍습 | 경제 | |
부여 | 사출도(마가, 우가, 구가, 저가) | 영고 | 형사취수제 | 순장, 1책12법 | 반농반목 |
고구려 | 제가회의 王 아래 사자, 조의, 선인 |
동맹 | 형사취수제 서옥제 |
1책 12법 | 약탈경제 |
옥저 | 군장 : 읍군, 삼로 | 민며느리제 | 가족공동묘 | 소금, 해산물 | |
동예 | 군장 : 읍군, 삼로 | 무천 | 족외혼 | 책화 | 단궁, 과하마, 반어피 |
삼한 | 소도(천군), 군장 : 신지, 읍차 제정 분리 |
계절제 | 벼농사 - 두레, 저수지 철(변한) |
풀이에 대한 접근) 고구려의 정치 제도에는 부여와 마찬가지로 왕 아래 상가, 고추가 등의 대가들이 있었으며, 이들은 각기 사자, 조의, 선인 등 관리를 거느리고 있었다. 중대한 범죄자가 있으면 제가 회의에 의해 사형에 처하고, 그 가족을 노비로 삼았다.
① 집집마다 부경이라는 창고가 있었다. (○) - 고구려입니다.
② 12월에 영고라는 제천 행사를 열었다. (×) - 부여입니다.
③ 혼인 풍습으로 민며느리제가 있었다. (×) - 옥저입니다.
④ 읍락 간의 경계를 중시하는 책화가 있었다. (×) - 동예입니다.
⑤ 제사장인 천군과 신성 지역인 소도가 존재하였다. (×) - 삼한입니다.
따라서 정답은 ① 번입니다.
풀이에 대한 접근) 김해 대성동 고분군은 경남 김해시 대성동에 있는 3~5세기 무렵 금관가야시대의 여러 무덤 유적지이다.
유물은 눈으로 많이 익혀두셔야 쉽게 답을 찾으실 수 있습니다.
① 백제 산수 무늬 벽돌 (×) - 백제의 문화재입니다.
② 칠지도 (×) - 4세기 후분에 백제에서 만들어 일본에 하사한 강철로 만든 의식용 칼입니다.
③ 가야의 철갑옷 (○) - 김해 대성동 고분군의 가야무덤에서 출토되었습니다.
④ 무령왕릉 석수 (×) -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백제 때 만들어진 석수입니다.
⑤ 발해 돌사자상 (×) - 중국 길림성 둔화현 정혜공주묘 앞에 있던 2개의 석상입니다.
따라서 정답은 ③ 번입니다.
풀이에 대한 접근)
(가) 5세기 고구려 장수왕이 수도를 국내성으로 평양성으로 옮겨 (427) 남진 정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면서 백제와 신라에 대한 압박을 강화하였다. 이에 대항하기 위해 백제의 비유왕과 신라의 눌지왕은 나·제 동맹(433~554)을 체결하였다. 이후 백제 동성왕(모대) 때 신라의 왕녀를 왕비로 삼아 나·제 동맹을 강화하였다.
(나) 신라의 배신행위에 분격한 성왕은 친히 군사를 이끌고 신라를 치다가 관산성 전투에서 전사(554) 하니, 백제의 중흥은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① 고구려가 낙랑군을 축출하였다. (×) - 고구려 미천왕(300~331)에 의해 낙랑군과 대방군이 멸망하였습니다. (313) (가) 이전입니다.
② 백제가 동진으로부터 불교를 수용하였다. (×) - 백제는 침류왕 때 동진을 통해 불교를 수용하였다. (384) (가) 이전입니다.
③ 신라가 고구려의 도움으로 왜를 격퇴하였다. (×) - 광개토대왕은 왜의 침입을 받은 신라를 도와 낙동강 유역의 가야제국에까지 군사를 보내 (400) 왜군을 격퇴하였습니다. (가) 이전입니다.
④ 고구려가 동옥저를 정복하여 영토를 확장하였다. (×) - 옥저는 한 군현의 분리 정책과 고구려의 압박으로 성장이 저지되어, 국가 형태를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 태조왕 4년 (56) 고구려에 편입되었습니다. (가) 이전입니다.
⑤ 백제가 신라와 연합하여 한강 유역을 수복하였다. (○) - 백제 성왕은 신장된 국력을 바탕을 대외적인 팽창을 꾀하여, (551) 신라와 협동작전을 통해 고구려에 빼앗겼던 한강 하류를 탈환하였습니다.
따라서 정답은 ⑤ 번입니다.
풀이에 대한 접근) 김춘추는 즉위 전 선덕여왕 때에 대야성이 백제에 함락되자 죽음을 무릅쓰고 고구려에 사신으로 갔으나 군사 원조를 얻는 데에 실패하였다. 이후 당과의 외교(648)를 성공적으로 이끌었고, 백제, 고구려 공격시 당의 군사 원조를 받아 삼국통일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① (가) (×) - 6세기말 남북조로 분열되었던 중국을 통일한 수는 고구려를 침공하였습니다.
② (나) (○) - 연개소문의 정변을 구실로 고구려를 침입한 당은 요동성을 함락시켰다. 하지만, 고구려는 안시성에서 끝가지 저항하여 당의 침입을 격퇴하였습니다. (645, 안시성 전투)
③ (다) (×) - 백제멸망(660) : 황산벌 전투는 의자왕이 보낸 계백의 5천 결사대와 김유신이 이끈 신라군이 대결하였으며 화랑이 활약하여 신라군이 승리하였습니다.
④ (라) (×) - 고구려 멸망(668) : 나·당 연합군이 연개소문이 죽은 후 내분으로 약해진 고구려를 공격하여 평양성을 함락하였습니다.
⑤ (마) (×) - 나·당전쟁(670-676) :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과 연합하여 당과 정면으로 대결하였고 이후 신라는 이근행이 이끄는 당의 20만 대군을 매소성에서 격파(675)하여 나·당 전쟁의 준도권을 장악하였고, 금강 하구의 기벌포에서 당의 수군을 섬멸(676)하여 당의 세력을 완전히 몰아냈습니다.
따라서 정답은 ② 번입니다.
김흠돌의 반란을 계기로 귀족 세력을 숙청하고 정치 세력을 다시 편성한 왕은 신문왕입니다. 신문왕의 업적을 묻는 문제이기에 각 업적에 대한 왕을 암기하시면 쉽게 해결하실 수 있습니다.
① 이사부를 보내 우산국을 복속하였다. (×) - 지증왕 시기입니다.
② 화랑도를 국가 조직으로 개편하였다. (×) - 진흥왕 시기입니다.
③ 관료전을 지급하고 녹읍을 폐지하였다. (○) - 신문왕 시기입니다.
④ 최고 지배자의 칭호를 마립간으로 하였다. (×) - 내물마립간 시기입니다.
⑤ 이차돈의 순교를 계기로 불교를 공인하였다. (×) - 법흥왕 시기입니다.
따라서 정답은 ③ 번입니다.
풀이에 대한 접근) 사진에 보이는 탑은 합천 해인사에 세워진 길상탑으로 통일신라시대의 석탑이다. 최치원이 지은 탑지에 절의 보물을 지키려다 희생된 스님들의 영혼을 위해서 탑을 건립했다.
① 빈민 구제를 위해 의창이 설치되었다. (×) - 고려 성종 시기입니다.
② 원종과 애노의 난 등 농민 봉기가 일어났다. - (○) 9세기말에 왕실과 귀족들의 사치와 향락으로 국가 재정이 바닥나면서 살기 어려워진 농민들은 토지를 잃고 노비가 되거나 원종과 애노의 난 (889) 등의 농민 반란이 발생하기도 하였습니다.
③ 복신과 도침이 주류성에서 군사를 일으켰다. (×) - 백제 멸망(660) 후 부흥 운동이 전개되었습니다.
④ 묘청 등이 중심이 되어 서경 천도를 주장하였다. (×) - 서경천도운동 (1135)
⑤ 부처의 힘을 빌려 외침을 막고자 팔만대장경이 조판되었다. (×) - 고구려 옛 장군 출신인 대조영이 고구려 유민 및 말갈족은 이끌고 동모산 근처에 도읍을 정하고 발해를 건국하였습니다. (698)
따라서 정답은 ② 번입니다.
풀이에 대한 접근) 발해가 건국하면서 고구려의 문화를 계승하여 고구려의 혼을 만주 지역에 심었고, 고구려의 영토를 회복하여 만주 지역을 우리 민족의 활동 무대로 유지시켰으며, 이로 인해 통일신라와 함께 남북국의 형세가 이루어졌다. 758년이라는 연도와 고구려 계승에서 발해임을 쉽게 알 수 있다.
① 중정대를 두어 관리를 감찰하였다. (○) - 발해의 문왕 시기입니다.
② 건원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다. (×) - 법흥왕의 연호입니다.
③ 군사 조직을 9서당 10정으로 편성하였다. (×) - 신문왕의 지방군입니다.
④ 골품에 따라 관직 승진에 제한을 두었다. (×) - 골품 제도는 신라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각 족장 세력을 통합, 편제한 엄격한 신분 제도입니다.
⑤ 상수리 제도를 시행하여 지방 세력을 견제하였다. (×) - 신라 정부는 지방 세력을 통제하기 위해 이들을 일정 기간 서울에 거주하게 하는 상수리 제도를 실시하였는데, 이 제도는 이후 고려 시대의 기인 제도로 이어졌습니다.
따라서 정답은 ① 번입니다.
① (가) - 내부에서 천마도가 수습되었다. (○) - 경주 천마총 장니 천마도, 5~6세기 신라에서 그려진 회화입니다.
② (나) - 자장의 건의로 건립되었다. (×) - 첨성대는 석조 건물로 선덕여왕 때 세워졌습니다. 자장의 건의로 황룡사 9층 목탑을 건립하였습니다.
③ (다) - 나무로 만든 14면체 주사위가 출토되었다. (○) - 동궁과 월지(안압지)는 14면체 주사위를 비롯하여 다양한 유물이 발굴되었습니다.
④ (라) - 돌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쌓아 올린 탑이 남아 있다. (○) -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은 삼국시대에 만든 석탑입니다.
⑤ (마) - 경내의 삼층 석탑에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발견되었다. (○) - 불국사 석가탑에서 발견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목판으로 찍은 두루마리 불경으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본입니다.
따라서 정답은 ① 번입니다.
풀이에 대한 접근) (가) 공산 전투(927) : 고려군은 크게 패하여 장군 김락과 신숭겸 등이 죽고, 많은 군사가 전사하였다.
(나) 일리천 전투(936) : 구미 지역에서 왕건의 고려군과 신검의 후백제군이 집결하여 벌어진 전투이다. 견훤이 고려군에 참전한 것이 알려지면서 후백제군의 사기가 떨어져 후백제군이 대패하였다.
① 최승로가 시무 28조를 건의하였다. (×) - 고려 성종 시기입니다.
② 경순왕 김부가 경주의 사심관이 되었다. (○) - 신라항복 (935) : 신라 경순왕은 고려에 자진 항복하였습니다.
③ 대공이 난을 일으키자 귀족들이 동참하였다. (×) - 신라 혜공왕 때, 대공이 난을 일으키자 귀족들이 동참하였다. 진압에 3년이 소모되었으며 신라 중대에서 하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사건입니다.
④ 궁예가 국호를 마진에서 태봉으로 바꾸었다. (×) - 신라 왕족 궁예는 송악(개성)에 도읍을 정하고 독립하여 후고구려를 건국(901)하였습니다. 이후 후고구려는 영토를 확장하고 국가 기반을 확립한 뒤 도읍을 철원으로 옮기면서 국호를 마진으로 바꾸었고, 이후에 다시 국호를 태봉으로 바꾸고 새로운 개혁 정치를 추구하였습니다.
⑤ 쌍기의 건의를 받아들여 과거제가 시행되었다. (×) - 광종의 왕권 안정과 중앙 집권 체제를 확립하기 위한 정책을 추진하였습니다.
따라서 정답은 ② 번입니다.
★ 개인적으로 만드는 기출문제 해설이기 때문에 공부를 하시다가 오류사항이 있으실 경우에는 댓글로 남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많이 부족하지만 열심히 하겠습니다! (우선은 하루에 10문제씩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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