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능력검정시험 제50회 심화 기출문제 해설 (11번~20번)
풀이에 대한 접근) 몽골의 간섭이 본격화된 이 시기, 일본 원정 등에서 '원 간섭기'이다.
① 삼수병으로 구성된 훈련도감이 창설되었다. (×) -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군사 제도의 불합리함을 깨달은 정부는 선조 때 유성룡의 건의로 용병제를 토대로 한 훈련도감을 설치하였습니다.
② 삼군부가 부활하여 군국 기무를 전담하였다. (×) - 19세기 사회 혼란 속에서 왕위에 즉위한 어린 고종 대신 권력을 장악한 흥선 대원군은 비변사를 폐지한 후 국방 사무를 담당하는 삼군부를 부활시키며, 의정부 기능을 강화시켰습니다.
③ 중서문하성과 상서성이 첨의부로 개편되었다. (○) - 중서문하성과 상서성이 통합되어 첨의부로 개편되었다가 추후 공민왕에 중서문하성과 상서성으로 복구되었습니다.
④ 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초계문신제가 시행되었다. (×) - 정조는 스스로 초월적 군주로 군림하면서 스승의 입장에서 신하들을 양성하고 재교육시키고자 초계문신제를 시행하였습니다.
⑤ 국방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비변사가 설치되었다. (×) - 비변사는 16세기 초 삼포왜란을 계기로 왜구와 여진에 대비하기 이해 병조 예하의 임시기구로 설치되었습니다.
따라서 정답은 ③ 번입니다.
풀이에 대한 키워드) 충렬왕 때 일연이 저술한 삼국유사는 불교사를 중심으로 고대의 민간 설화나 전래 기록을 수록하였다.
① 단군의 건국 이야기를 수록하였다. (○) - 충렬왕 때 일연이 저술한 삼국유사는 우리의 고유문화와 전통을 중시하였으며, 단군을 우리 민족의 시조로 여겨 단군의 건국 이야기를 수록하였습니다.
② 사초, 시정기 등을 바탕으로 편찬되었다. (×) - 조선왕조실록은 한 왕대의 역사를 그 왕이 죽은 후에 연대순으로 기록한 편년체로 쓴 책으로서, 편찬자료로 사관이 기록한 사초와 각 관청의 문서들을 모아 만든 시정기를 중심으로, 승정원일기, 의정부등록, 비변사등록, 일성록 등을 보조 자료로 하여 편찬하였습니다.
③ 왕명에 의해 고승들의 전기를 기록하였다. (×) - 왕명을 받은 승려 각훈이 삼국시대에 활약했던 승려들의 열전을 모아서 해동고승전을 만들었습니다.
④ 본기, 열전 등 기전체 형식으로 서술되었다. (×) - '삼국사기'는 문하시중이었던 김부식 등 11명이 왕명을 받아 편찬한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역사서입니다.
⑤ 서사시 형태로 고구려 계승 의식이 반영되었다. (×) - 동명왕편은 이규보 개인의 창작이 아니라 민간전승으로 내려온 고구려 건국 영웅인 동명왕의 업적을 칭송한 영웅서사시입니다.
따라서 정답은 ① 번입니다.
풀이에 대한 접근) 쌍기, 과거가 언급되므로 고려 광종 시기의 일을 찾아본다.
① 녹과전을 지급받는 관리 (×) - 고려시대에 전란으로 전시과 체제가 붕괴하자 녹봉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관리에게 녹과전을 지급하였습니다.
② 만권당에서 책을 읽는 학자 (×) - 만권당은 고려 충선왕이 원나라 연경에 있을 때 세운 독서당으로 이제현 등이 원의 학자들과 교류하면서 성리학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켰습니다.
③ 주전도감에서 화폐를 주조하는 장인 (×) - 고려 성종, 최초의 독자적 화폐인 건원중보를 주조하였으나 유통되지 못하였으며 고려 숙종 때 대각국사 의천이 주전의 필요성을 주장하여 돈을 발행하는 주전도감이 설치되었습니다.
④ 노비안검법에 의해 양인으로 해방되는 노비 (○) - 광종은 후삼국 시대의 혼란기에 불법적으로 노비가 된 자를 조사하여 양인으로 해방시켜 주기 위한 법인 노비안검법을 실시하였습니다.
⑤ 금속 활자로 직지심체요절을 인출하는 기술자 (×) -직지심체요절은 고려 말에 청주 흥덕사에서 인쇄된 금속 활자본으로 상, 하권으로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정답은 ④ 번입니다.
풀이에 대한 접근) 논산 관촉사 석조 미륵보상 입상은 고려 초기의 대형 석불 양식을 보여준다.
① 춘궁리철조석가여래좌상 (○) - 고려시대 초기의 불상입니다.
② 경주 석굴암 본존불 (×) - 통일 신라 시대의 문화유산입니다.
③ 안동 이천동 마애 여래 입상 (○) - 고려 시대의 입상입니다.
④ 영주 부석사 소조 아미타여래 좌상 (○) - 신라 양식을 계승한 고려 초기의 대표적 불상입니다.
⑤ 하남 교산동 마애약사여래좌상 (○) - 고려 초기의 불상으로 제작 시기(977)가 새겨져 있습니다.
따라서 정답은 ② 번입니다.
풀이에 대한 접근) 조위총의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성장한 최충헌은 이의민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최충헌은 최씨 정권의 최고 권력 기구인 교정도감을 설치한 후, 스스로 최고 장관인 교정별감이 되어 권력을 행사하였다.
① 서경에서 난을 일으키고 국호를 대위로 하였다. (×) - 묘청입니다.
② 화약과 화포 제작을 위한 화통도감 설치를 건의하였다. (×) - 최무선입니다.
③ 삼별초를 이끌고 진도로 이동하여 대몽 항쟁을 펼쳤다. (×) - 배중손입니다.
④ 교정별감이 되어 인사, 재정 등 국정 전반을 장악하였다. (○) - 최충헌입니다.
⑤ 전민변정도감의 책임자로 임명되어 권문세족을 견제하였다. (×) - 신돈입니다.
따라서 정답은 ④ 번입니다.
풀이에 대한 접근) 양규는 거란의 2차 침입 때, 활약한 장수이다.
(가) 거란군은 홍화진을 공격하였으나 양규의 항전으로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고려 현종은 강조를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싸우게 하였으나 패배하였고 강조는 사형당하였다. 거란은 개경을 함락하였고 현종은 나주까지 피란하였다. 이후 고려와 화친을 맺고 돌아갔으며 회군 중에 양규 등의 공격을 받아 많은 피해를 입었다. (2차 침입, 1010)
(나) 예종 때, 윤관은 부원수 오연총과 함께 17만의 대군을 이끌고 정주관을 지나 함흥평야를 점령하고, 9개의 성(동북9성)을 쌓아 군사를 주둔시켰다. (1107)
(다) 몽골은 1231년 1차 침입을 시작으로 여러차례에 걸쳐서 침입하였다. 1차 침입 때, 몽골은 귀주성에서 박서가 저항하여 함락시키지 못하였으나, 개경을 포위하여 고려 조정과 강화하였다. 고려 조정은 1차 침입 이후에 강화도로 천도하였다.
① (가) - (나) - (다)
따라서 정답은 ① 번입니다.
풀이에 대한 접근) 고려시대 숙종 때에 은화를 만들었는데 은병, 활구로 불리었다.
① 모내기법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 - 이앙법(모내기법)은 정부의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17세기 이후 전국으로 확대되었고 벼와 보리의 이모작으로 농민들의 단위 면적당 생산량이 증가하였습니다. 조선 후기입니다.
② 덕대가 광산을 전문적으로 경영하였다. (×) - 덕대는 광산 주인에게 채굴한 광물의 일부분을 주기로 하고 광산 주인으로부터 광물 채굴권을 받아서 경영하는 사람입니다. 조선 후기입니다.
③ 면화, 담배 등이 상품 작물로 재배되었다. (×) - 인삼, 담배, 목화(면화), 채소 등의 작물들을 재배하여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었고, 외국에서 고구마 (1600년대 초), 감자, 고추, 토마토 등 새로운 작물들도 전래되어 이전보다 먹을거리가 많아졌습니다. 조선 후기입니다.
④ 예성강 하구의 벽란도가 국제 무역항으로 번성하였다. (○) - 예성강 하구에 자리 잡은 항구인 벽란도는 고려의 중심 무역항이었습니다.
⑤ 토지의 비옥도에 따라 6등급으로 나누어 전세를 거두었다. (×) - 세종은 공법을 제정하였는데, 토지를 비옥도에 따라 6등급으로 나누어 면적을 확정하였습니다. (전분6등법)
따라서 정답은 ④ 번입니다.
① (가) - 조선 건국 이후 한양으로 천도한 과정을 조사한다. (○) - 1392년에 공양왕이 왕대비에게 준 옥새를 이성계가 받고 신료들의 추대로 조선이 건국되었습니다. 1393년에 국호를 조선이라 하였고 1394년 한양으로 천도하였습니다. 조선왕조의 건립에 따라 창건되어 초기에 정궁으로 사용된 궁궐인 경복궁입니다.
② (나) - 국왕이 신농, 후직에게 풍년을 기원하던 의례를 검색한다. (×) - 서울 선농단 : 조선시대에 신농씨와 후직씨를 제사 지내던 곳입니다. 신농과 후직은 한족에게 처음으로 농사 지내는 법을 알려주었으며 농업의 신으로 숭배되고 있습니다.
③ (다) - 인조가 피신하여 청과 항전을 벌인 과정을 살펴본다. (○) - 청나라의 침입으로 한양이 점령되자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45일간 대항하였지만, 결국 청나라에 항복하였습니다.(삼전도의 굴욕)
④ (라) - 장용영 외영의 창설 배경을 알아본다. (○) - 정조의 친위부대인 장용영은 내.외영으로 구성되었습니다. 내영은 수도에 주둔하면서 국왕 경호, 수도 방어 등을 수행하였고 외영은 수원 화성에 주둔하였습니다.
⑤ (마) - 훈민정음을 창제한 목적을 파악한다. (○) -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뜻의 훈민정음은 우리글이 없어 한자를 익혀야 하는 백성들의 어려움을 없애기 위해 세종이 만들었습니다. 영릉은 세종대왕과 소헌왕후의 합장릉입니다.
따라서 정답은 ② 번입니다.
풀이에 대한 접근) 만력제, 신종을 힌트로 명나라임을 알아내야 한다. 의주가 북쪽에 있으므로 명나라 또는 청나라로 유추하여 문제를 풀 수도 있다.
① 광군을 조직하여 침입에 대비하였다. (×) - 광군은 고려 정종 때 거란을 대비로 조직된 특수 부대입니다.
② 한성에 동평관을 두어 무역을 허용하였다. (×) - 동평관은 조선 시대의 일본 사신이 머물던 숙소입니다. 임진왜란 이후에 폐지되었습니다.
③ 정도전을 중심으로 요동 정벌을 추진하였다. (○) - 정도전이 중심이 되어 명나라의 요동 정벌을 추진하였습니다.
④ 기유약조를 체결하고 부산에 왜관을 설치하였다. (×) - 임진왜란이 끝난 후, 광해군 때 일본과 기유약조를 체결한 후 부산포에 다시 왜관을 설치하여 제한된 범위 내에서의 교섭을 허용하였습니다.
⑤ 포로 송환을 위하여 유정을 회답 겸 쇄환사로 파견하였다. (×) - 유정은 조선 중기의 고승으로 호는 사명당입니다. 사명대사로도 유명합니다.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이끌고 평양성 전투에 참가하였습니다. 임진왜란 이후 포로 송환 및 외교 활동을 위해 선조의 명으로 일본에 사신으로 파견되었습니다.
따라서 정답은 ③ 번입니다.
풀이에 대한 접근) 추사 김정희는 제주도에서 유배 생활을 하며 세한도를 그렸다.
① 100리 척을 사용하여 동국지도를 제작하였다. (×) - 조선 영조 때 정상기가 동국제도를 제작하였습니다.
② 무한 우주론을 주장한 의산문답을 집필하였다. (×) - 홍대용은 청에 왕래하면서 얻은 경험을 토대로 '임하경륜', '의산문답' 등의 저술을 남겼는데, '담헌집'에 수록되어 전하고 있습니다.
③ 명에서 천리경, 자명종, 홍이포 등을 들여왔다. (×) - 조선 후기 중국을 다녀온 사신들이 중국에 머물던 서양 선교사들과 만나 서양 문물을 직접 소개받거나 그들 중 일부는 서양 문물을 조선에 들여와 소개하였습니다. 조선에 전래된 대표적인 서양 문물은 세계지도인 '곤여만국전도', 자명종, 천리경 등입니다.
④ 침구술을 집대성하여 침구경험방을 저술하였다. (×) - 조선 후기에 의관 허임이 침구술을 집대성하여 침구경험방을 저술하였습니다.
⑤ 북한산비가 진흥왕 순수비임을 처음으로 고증하였다. (○) - 김정희는 당시까지 무학대사의 비라 알려졌던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를 고증하였습니다.
따라서 정답은 ⑤ 번입니다.
★ 개인적으로 만드는 기출문제 해설이기 때문에 공부를 하시다가 오류사항이 있으실 경우에는 댓글로 남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한국사능력검정시험'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국사능력검정시험 제50회 심화 기출문제 해설 (31번~40번) (0) | 2024.01.30 |
---|---|
한국사능력검정시험 제50회 심화 기출문제 해설 (21번~30번) (0) | 2024.01.29 |
한국사능력검정시험 제50회 심화 기출문제 해설 (1번~10번) (0) | 2024.01.27 |
한국사능력검정시험 제49회 심화 기출문제 해설 (41번~50번) (0) | 2024.01.26 |
한국사능력검정시험 제49회 심화 기출문제 해설 (31번~40번) (0) | 2024.01.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