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능력검정시험 제55회 심화 기출문제 해설 (21번~30번)
풀이에 대한 접근) 정조는 왕실 도서관인 규장각을 창덕궁에 설치하여, 자신의 권력을 뒷받침할 수 있는 강력한 정치 기구로 육성하였다.
① 을묘왜변을 계기로 상서화되었다. (×) - 비변사입니다.
② 은대(銀臺), 후원(喉院)이라고도 불리었다. (×) - 승정원입니다.
③ 5품 이하 관리 임명에 서경권을 행사하였다. (×) - 조선 사헌부와 사간원입니다.
④ 대사성을 중심으로 좨주, 직강 등의 관직을 두었다. (×) - 성균관입니다.
⑤ 유능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초계문신제를 주관하였다. (○) - 정조는 초계문신제를 시행하였습니다.
따라서 정답은 ⑤ 번입니다.
풀이에 대한 키워드) [훈련도감]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군사 제도의 불합리함을 깨달은 정부는 선조 때 유성룡의 건의로 용병제를 토대로 한 훈련도감을 설치하였다. (1593) 훈련도감의 군병은 포수, 살수, 사수의 삼수병을 편제되었다.
① 수원 화성에 외영을 두었다. (×) - 정조의 친위부대 장용영입니다.
② 용호군과 함께 궁성을 호위하였다. (×) - 고려의 중앙군은 용호군, 응양군으로 편제되었습니다.
③ 후금의 침입에 대비하고자 창설되었다. (×) - 인조의 어영청입니다.
④ 포수, 사수, 살수의 삼수병으로 편제되었다. (○) - 훈련도감의 군병은 포수, 살수, 사수의 삼수병을 편제되었습니다.
⑤ 일본인 교관을 초빙하여 군사 훈련을 받았다. (×) - 강화도 조약 이후 별기군(1881)이 창설되었습니다.
따라서 정답은 ④ 번입니다.
풀이에 대한 접근) 충주 탄금대 전투 -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파죽지세로 진군하는 왜군을 막기 위하여 조선의 정예병을 모아 충주의 평야에서 벌어진 전투이다. 배수진을 치고 왜군 약 2만명과 결전을 벌였다. 이 패배로 인하여 왜군은 한양까지 일사천리로 진군하였다.
동래성 - 탄금대 - 한산도 - 진주대첩 - 평양성 탈환 - 행주 대첩
① 김시민이 진주성에서 항쟁하였다. (○) - 진주대첩(1592.11)입니다.
② 조명 연합군이 평양성을 탈환하였다. (○) - 평양성 탈환(1593.01)입니다.
③ 이순신이 한산도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 - 한산도 대첩(1592.08)입니다.
④ 송상현이 동래성 전투에서 항전하였다. (×) - 일본의 침입(1592.04) : 부산 첨사 정발과 동래부사 송상현이 이끄는 육군이 분전하였으나 부산진과 동래성에서 패하였습니다.
⑤ 권율이 행주산성에서 적군을 격퇴하였다. (○) - 행주 대첩(1593.02)입니다.
따라서 정답은 ④ 번입니다.
풀이에 대한 접근) 세손, 군역 부담 감소(균역법) 등에서 영조이다.
① 조선의 기본 법전인 경국대전을 완성하였다. (×) - 성종입니다.
② 붕당의 폐해를 경계하기 위한 탕평비를 건립하였다. (○) - 영조입니다.
③ 시전 상인의 특권을 축소한 신해통공을 실시하였다. (×) - 정조입니다.
④ 전세를 1결당 4~6두로 고정하는 영정법을 제정하였다. (×) - 인조입니다.
⑤ 각 궁방과 중앙 관서의 공노비 6만여 명을 해방하였다. (×) - 순조입니다.
따라서 정답은 ② 번입니다.
풀이에 대한 접근) [추사 김정희] 김정희는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서예가, 금석학자, 고증학자, 실학자이다. 호는 완당, 추사 등이 있으며 무학대사의 비라 알려졌던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를 고증하였다.
① 담헌서를 통해 과거제 폐지를 주장하였다. (×) - 홍대용입니다.
② 역대 명필을 연구하여 추사체를 창안하였다. (○) - 김정희는 한국과 중국의 비문을 보고 만든 추사체가 있습니다.
③ 북학의를 저술하여 수레와 배의 이용을 권장하였다. (×) - 박제가입니다.
④ 연려실기술에서 조선의 역사를 기사 본말체로 서술하였다. (×) - 연려실기술은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긍익이 집필한 책으로 조선시대의 야사를 기록하였으며 기사본말체로 서술하였습니다.
⑤ 주역을 바탕으로 수론(數論)을 전개한 구수략을 저술하였다. (×) - 숙종 때, 최석정이 주역을 바탕으로 수론을 전개한 구수략을 저술하였습니다. 구수략에는 마방진 등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정답은 ② 번입니다.
ㄱ. 막부의 요청에 따라 통신사를 파견하였다. (○) - 에도 막부는 다시 외교 관계를 맺자고 요청해 왔습니다. 이에 조선은 여러 차례에 걸쳐 외교 사절단(회답 겸 쇄환사)을 파견하여 전쟁 중에 끌려간 조선인들을 데리고 돌아왔으며, 친선 관계를 두텁게 하였습니다. 통신사를 파견하였습니다.
ㄴ. 한성에 동평관을 두어 무역을 허용하였다. (○) - 동평관은 조선 시대의 일본 사신이 머물던 숙소입니다. 임진왜란 이후에 폐지되었습니다.
ㄷ. 하정사, 성절사, 동지사 등 사절단을 보내었다. (×) - 조선시대에 명나라나 청나라에 정기적으로 보내는 사신을 삼절하라 하였으며 하정사, 성절사, 동지사라 하였습니다. 또한 황제, 황태후 등의 생일에 보내는 사신은 천추사라 하였습니다.
ㄹ. 어윤중을 서북 경략사로 임명하여 사무를 관장하였다. (×) - 어윤중은 조사시찰단의 일원으로 일본에 다녀온 후 서북경락사에 임명되어 청나라, 러시아 등과 국경을 확정하였습니다.
① ㄱ, ㄴ
따라서 정답은 ① 번입니다.
① 법주사 팔상전 (○) - 충남 보은 법주사 팔상전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인조 때 재건하였습니다.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유일한 조선 시대 목탑입니다. 현존하는 우리나라의 탑 중에서 가장 높으며 조선 후기의 중요한 건축물입니다.
② 화엄사 각황전 (×) - 전라남도 구례군 화엄사 각황전은 조선후기의 건축물입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으며 인조 때 화엄사를 복구하였으며 각황전은 숙종 때 중건되었습니다. 정면 7칸, 측면 5칸으로 내부 전체가 한 칸의 방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③ 금산사 미륵전 (×) - 전라북도 김제 금산사 미륵전은 3층으로 된 건물입니다. 후백제 견훤은 한 때, 금산사 미륵전에 유폐되었으며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인조 때 재건축한 것으로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불교 건축물입니다.
④ 무량사 극락전 (×) - 충남 부여 무량사 극락전은 조선 중기의 중층 건물입니다.
⑤ 마곡사 대웅보전 (×) - 충남 공주 마곡사 대웅보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지어진 17세기에 건립된 건물입니다.
따라서 정답은 ① 번입니다.
풀이에 대한 접근) [신유박해(1801, 순조)] 신유박해는 천주교 박해사건이다. 이승훈, 정약종이 처형되었고 정약용, 정약전이 유배되었다.
[동학의 창시] 동학은 경주의 몰락 양반인 최제우가 서양의 힘을 배경으로 한 서학에 맞선다는 의미에서 창시하였다. (1860)
1801~1860년 사이의 일을 찾아본다. 적당히 세도시기 근처의 일을 찾으면 될 것으로 보인다.
① 왕이 도성을 떠나 공산성으로 피란하였다. (×) - 인조반정 후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이괄이 반란을 일으켜 서울을 점령하였는데(이괄의 난, 1624), 이때 인조가 공주 공산성으로 피난하였다가 그 잔당이 후금과 내통하였습니다.
② 오페르트가 남연군 묘 도굴을 시도하였다. (×) - 1868년 독일 탐험가 오페르트가 충남 덕산에 있는 흥선 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도굴하려다 실패한 사건입니다.
③ 홍경래 등이 난을 일으켜 정주성을 점령하였다. (○) - 홍경래의 난(1811~1812)은 19세기 세도 정치기에 발생된 민란입니다. 서북인에 대한 차별과 더불어 이 시기 평안도에 한동안 계속되었던 가뭄도 난이 일어나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④ 교조 신원을 요구하는 삼례 집회가 개최되었다. (×) - 교조신원 운동은 1864년에 동학 교조 최제우가 처형당한 후, 최제우의 죄를 풀어주고 종교자유를 얻기 위한 운동입니다. (1892~1893)
⑤ 이인좌를 중심으로 한 소론 세력이 난을 일으켰다. (×) - 영조는 이인좌의 난(1728)을 진압한 후 탕평책을 펴나가려고 노력하였습니다.
따라서 정답은 ③ 번입니다.
풀이에 대한 접근) 경복궁 중건에서 흥선대원군 집권시기이다.
ㄱ. 비변사가 설치되었다. (×) - 비변사는 16세기 초 삼포왜란(중종 9년, 1510)을 계기로 왜구와 여진에 대비하기 위해 병조 예하의 임시기구로 설치되었고, 16세기 중엽 을묘왜변(명종 10년, 1555) 후 상설 기구화 되었습니다.
ㄴ. 사창제가 실시되었다. (○) - 흥선 대원군은 양전 사업, 호포제, 사창제 등을 실시하여 삼정을 개혁하였습니다.
ㄷ. 원납전이 징수되었다. (○) - 경복궁을 중건한 흥선 대원군은 막대한 공사비를 마련하기 위해 원납전을 강제 징수하고, 당백전을 남발하여 물가의 폭등이나 경제적 혼란을 가져오기도 하였습니다.
ㄹ. 대전통편이 편찬되었다. (×) - 정조는 '경국대전, 속대전'을 통합한 대전통편을 편찬하였습니다.
③ ㄴ, ㄷ
따라서 정답은 ③ 번입니다.
풀이에 대한 접근) [병인양요(1866)] 병인양요는 천주교 탄압(병인박해)를 빌미로 하여 일어났다. 프랑스는 병인박해 때 선교사의 처형을 구실로 침략하였는데, 실제는 통상을 요구하였다. 프랑스는 극동 함대 사령관 로즈 제독이 이끄는 군함을 파견하여, 흥선 대원군의 굳은 항전 의지와 한성근, 양헌수 부대의 분전으로 문수산성과 정족산성에서 프랑스 군을 격퇴시켰다. 이때 프랑스 군인들은 외규장각의 문화재를 비롯하여 서적과 병기들을 약탈하여 갔다.
① 운요호가 강화도와 영종도를 공격하였다. (×) - 운요호 사건(1875)은 일본 군함 운요호가 강화도에 접근하여 충돌한 사건으로, 강화도 조약(1876)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② 양헌수 부대가 정족산성에서 승리하였다. (○) - 프랑스는 극동 함대 사령관 로즈 제독이 이끄는 군함을 파견하여, 흥선 대원군의 굳은 항전 의지와 한성근, 양헌수 부대의 분전으로 문수산성과 정족산성에서 프랑스 군을 격퇴시켰습니다. 이때 프랑스 군인들은 외규장각의 문화재를 비롯하여 서적과 병기들을 약탈하여 갔습니다.
③ 정부가 청군의 출병을 요청하는 계기가 되었다. (×) - 청군은 임오군란, 갑신정변, 동학농민운동 때 개입하였는데, 정부가 출병을 요청한 것은 동학농민운동때입니다.
④ 사태 수습을 위해 박규수가 안핵사로 파견되었다. (×) - 임술 농민 봉기에 대한 설명입니다.
⑤ 흥선 대원군이 톈진으로 압송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 - 임오군란에 대한 설명입니다.
따라서 정답은 ② 번입니다.
★ 개인적으로 만드는 기출문제 해설이기 때문에 공부를 하시다가 오류사항이 있으실 경우에는 댓글로 남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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